이어령 [李御寧] 2

지난해 팔순 잔치를 치른 이어령 교수(전 문화부 장관)는 여전히 바쁘다. 그는 오늘도 지식의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야전사령관이다. “선생님 서재에는 어떤 신무기가 있나요?” 매번 들려주는 새로운 이야기에 감탄하며 비결을 물었더니 “고양이 7마리”라는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을 찾았다. 서재에 들어서자 3m가 넘는 책상 위에 컴퓨터 모니터가 무려 6대나 보였다. “고양이는?” “저게 내 고양이들이야.컴퓨터를 사과(apple)라고 부르는 것은 본 적이 있지만 고양이라는 것은 처음 본다. 컴퓨터로 하는 설계를 캐드(CAD)라고 하잖아. Computer Aided Design. 이건 내 생각을 돕기 때문에 ‘Computer Aided Thinking’, 줄이면 캣(CAT)이야. 아무리 슈퍼컴퓨터라도 사람의 생각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사고의 주체는 인간이고 컴퓨터는 그 생각을 도울 뿐 대신해 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컴퓨터를 사고의 해결사로 알고 있습니다.”그런데 고양이가 여섯 명인데요?” “그래, 작은 고양이는 내 침실 침대 옆에 있어.” 그는 노트북을 작은 고양이라고 불렀다. 아마 잠자리에서도 노트북으로, 전자책으로, 메일을 보내고 메모도 하는 것 같았다.’고양이’가 7마리나 필요한 이유를 묻자 그는 대답 대신 컴퓨터 전원을 차례로 켰다. 자,이컴퓨터에서는인터넷을열어놓고TED동영상을듣고중요한내용은마인드젯(mindjet)앱으로정리합니다. 다른 컴퓨터에는 에버노트(evernote) DB를 검색하면서 중요 자료를 긁어 마인드젯 메모노트에 붙여줘” 이 교수는 수잔 블랙모어 교수의 최신 미메틱스 인터넷 강연이 클라우드 컴퓨팅으로 정리돼 한 편의 논문이 돼가는 과정을 직접 보여줬다. 그의 컴퓨터에는 마인드젯 외에도 ‘더 브레인’, 국내 앱으로 ‘씽크와이즈’도 있었다. 고양이가 쥐를 잡듯이, 그리고 그 손톱으로 화면 자료를 긁어 빠르게 DB를 구축해가는 모습을 옆에서 보니 컴퓨터를 고양이라고 불렀다는 것이 실감났다.이렇게 자료로 모은 파일은 아래 한글로 변환하여 드롭박스에 보내 저장한다. 그러면 7대, 아니 수십대의 다른 컴퓨터에서 직접 호출해 원고를 쓸 수 있다. 해외여행을 하는 경우도 서재에서 컴퓨터를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새끼 고양이들은 무릎에도 올라 있다. 책상 맞은편 안락의자 옆에는 아이패드, 갤럭시노트, 킨들과 같은 모바일 기기가 나란히 꽂혀 있었다.그가 즐겨 찾는 사이트는 와이어 인터넷판(www.wired.com). 일주일에 적어도 1번은 꼭 들어 본다”라고 말했다.”논문과 책이 되기 전에 지식인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취재한 기사이다. 이미 나온 책을 보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디어를 공유하면서 함께 생각하고 가는 시대야.”디지로그나 생명 자본주의의 같은 말들은 인터넷을 검색해도 안 나오고 그것이 바로 이런 글로벌 지식의 싱크로나이즈에서 나왔을까?그는 이렇게 말했다.”자본주의의 배와 함께 침몰할 수는 없다. 그래서 저는 지금 떼를 만들고 있는 중이야. 이처럼 지식의 최전선이 형성된 정작 지식인들이 뒤편에만 앉아 있으면 될까요?”문정 형모(정·효은모)기자 [email protected]사진, 정·허 송 객원 기자/중앙 선데이 2014.09.13 03:27 <연합초대석>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베이징올림픽은 동북아 패러다임을 바꾼 세계적 이벤트> “중국의 반한감정, 경쟁의식과 민족주의에서 출발해 “중일에 맞서기 위해서는 물량보다 보편성, 고유특성을 가져야 한다” “문화경쟁력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서울=연합뉴스) 홍성완 편집위원=”냉정하게 분석해야 한다. 우리에게 잘못이 뭐가 있었고 중국의 잘못이 뭐가 있었는가. 예를 들면 역풍이라는 게 있죠. 공을 그냥 들고는 안 날아갑니다. 세게 때리면 세게 반작용으로 올라옵니다. 그러면 중국인 혐한증이 있기 전에 뭔가 한국이 세게 때린 적이 있잖아요. 그게 한류였죠.”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올림픽 기간 중국인들이 드러낸 반한 감정의 배경에 대해 역사 문화적 논리로 설명하면서 한류 문화도 하나의 빌미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중일 3국이 민족주의 경쟁을 하면 깨지는 것은 한국이라며 3국이 ‘가위바위보’ 원리에 따라 서로의 특성을 존중하면서 경쟁과 협력을 동시에 해나가는 커피티션(copetition) 관계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베이징 올림픽이 갖는 의미와 상징, 한. 중국 관계에 미치는 영향 등을 이어령 전 장관에게서 들었다. 88서울올림픽 개회식 당시 쇠고리 소년의 아이디어로 세계를 놀라게 한 이 전 장관은 최근 첫 시집을 내는 등 70대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베이징올림픽을 지켜본 감회가 깊었던 것 같은데요.▲ 이번 베이징 올림픽은 중국인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동북아 패러다임을 바꾸는 큰 세계적인 행사였습니다. 동북아에서 가장 먼저 올림픽을 한 곳이 도쿄였고, 거의 20년 후에 서울에서, 또 20년 후에 베이징에서 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도 이렇게 시나리오를 쓸 수는 없잖아요. 남미라든지 이른바 남반구에서는 올림픽을 할 수 있는 나라가 없습니다. 호주 정도가 있을 뿐이에요. 19세기만 해도 동쪽은 동, 서쪽이라고 했지만 아시아에서 세 나라가 올림픽을 치른 지금은 동서양의 문명 문화적 균형이 거의 평준화되고 거의 같은 눈높이로 업그레이드되었습니다.유럽 기준으로 보면 일본은 해양, 한국은 반도, 중국은 대륙입니다. 해양세력이 반도에서 대륙으로, 즉 씨파워에서 랜드파워로, 랜드파워에서 씨파워로 오는 문명선을 너무나 극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도쿄, 서울, 베이징을 합쳐서 ‘베세토’라고 하는데, 이 베세토라는 맥락에서 읽지 않으면 베이징 올림픽이 갖는 의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중국이 다시 아시아의 맹주로 돌아왔습니다. 중국이 제일 처음에는 이념대국이었고 이어서 군사대국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개방하지 않았다면 올림픽이 되었을까요?개방에 좀 더 채찍을 가해서 지금은 이념, 군사, 경제, 그다음에 문화의 힘, 이것을 중국이 가지려고 하는 거죠. 우리에게는 매우 충격적이고,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중국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볼 수 없는 자유분방함입니다. 새 둥지로 불린 주경기장 하나만 봐도 사회주의 건축물은 아니라는 것이군요. 서울 올림픽 때와 비교해 보면 어떻습니까.▲ (쇠고리 소년 얘기를 하면서) 역대 개폐회식에는 아이가 나온 적이 없었어요. 튼튼한 남자 중심으로 되어 있었는데 처음으로 아이를 앞세워 생명이라는 것, 정적 속에서 아이가 흰 옷을 입고 쇠고리를 굴리며 지나가는 빈 공간, 아이를 보여준 것이 아니라 그 햇살이 가득한 주경기장 자체와 배경, 즉 그림을 그리는 백지를 그림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돈이나 재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정적과 공백을 이용한 동양의 정신, 그 자체를 보여준 것입니다. 이런것들이문화이고예술이지불꽃을몇발 쐈는지불꽃으로무엇을그렸는지이런것들은기술이죠. 베이징 올림픽의 경우 립싱크한 것은 괜찮지만 올림픽 행사를 전 세계에 보여주기 위한 영화 촬영 세트장으로 만든 것은 비난받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막강한 일본과 이번에 본 것처럼 화려하고 웅장한 중국 사이에서도 우리가 살아남을 힘이 있다고 느낍니다. 20년 전, 우리는 대낮에 개회식을 가졌습니다. 거짓말을 할 수 없고 가짜도 만들 수 없어요. 햇빛 아래 어디에 숨기고 매달아요? 그런 대낮에 영상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들의 숨결과 꿈틀거리는 역동성을 보여준 것입니다. 물량주의 경쟁에서는 저희가 어렵습니다. 장예모 감독의 영화적인 화려한 스펙터클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쇠고리처럼 뒤통수를 때리는 아이디어나 창의력을 가지면 중국의 13억을 한 사람이 이길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우리가 일본, 중국과 경쟁할 때는 도쿄나 베이징 올림픽이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을 서울 올림픽이 보여준 것이 무엇이었는지 이를 평가하고 검증하고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넘버원이 아니라 온리원(only one), 한국이 해야 남들이 할 수 있는 것, 이 온리원이 있을 때 우리는 작든 크든 존재 이유가 있고 세상에 살아남아 당당히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베이징 올림픽을 보면서 무조건 우리는 안 된다는 패배주의에 빠져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우리가 잘난 체하는 우월의식을 가져서도 안 됩니다.주경기장을 외국인에게 발주했다고 해서 중국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그것은 큰 실수입니다. 그런 건축가를 사용할 수 있는 중국, 독특한 설계를 받아준 중국이 놀라운 일이라는 거죠. 중국의 주경기장이 우리를 압도했듯이 서울올림픽 주제가 ‘한인한'(hand in hand)은 중국을 압도해버렸습니다. 외국인에게 작곡을 발주했는데 가사 중에 ‘벽을 넘어’ ‘아리랑’ ‘서울’이라는 3절을 넣어 한국화시킨 것을 전 세계에 800만 장이나 팔았습니다. 그 아이디어가 중요한 거죠. 정확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욕하는 것, 욕하고 칭찬하는 것, 또 우리를 비교해서 다른 사람의 좋은 점, 나쁜 점을 객관적으로 봐야 합니다. 민족우월의식을 가지고 덮어씌워서도 안 되고, 중국을 덮고 숭배하거나 비하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이 베이징 올림픽을 보는 관전평입니다. –중국인이 한국팀이 아닌 일본팀을 응원한 것을 어떻게 봐야 합니까.▲ 혐한증이 있기 전에 뭔가 한국이 중국에 대해서 세게 때린 적이 있죠. 그게 한류였네요. 한편으로는 대장금을 통해 한국 것을 즐기면서도 한편으로는 한류 열풍에 대한 역효과도 커지는 것입니다. 한류 열풍을 가장 싫어하는 것이 중국 배우들입니다. 한류 배우들이 중국에 오면 사람들이 열렬한 반응을 보이니까 기분이 너무 안 좋아지더라고요. 중국 배우 몇 명이 반발하기 시작하면서 한국을 비방한 것 중 하나가 대장금에 나오는 침전입니다. 한의는 중국이 원조인데 자기들 것이라며 판다는 식으로 말했고, 즐겨 보던 사람들도 쾌활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5월 5일 단오절처럼 기수가 합쳐지는 달은 중양절이라고 해서 시경에도 나오는 중국의 아주 오래된 전통입니다. 근데 유네스코에

지난해 팔순 잔치를 치른 이어령 교수(전 문화부 장관)는 여전히 바쁘다. 그는 오늘도 지식의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야전사령관이다. “선생님 서재에는 어떤 신무기가 있나요?” 매번 들려주는 새로운 이야기에 감탄하며 비결을 물었더니 “고양이 7마리”라는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을 찾았다. 서재에 들어서자 3m가 넘는 책상 위에 컴퓨터 모니터가 무려 6대나 보였다. “고양이는?” “저게 내 고양이들이야.컴퓨터를 사과(apple)라고 부르는 것은 본 적이 있지만 고양이라는 것은 처음 본다. 컴퓨터로 하는 설계를 캐드(CAD)라고 하잖아. Computer Aided Design. 이건 내 생각을 돕기 때문에 ‘Computer Aided Thinking’, 줄이면 캣(CAT)이야. 아무리 슈퍼컴퓨터라도 사람의 생각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사고의 주체는 인간이고 컴퓨터는 그 생각을 도울 뿐 대신해 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컴퓨터를 사고의 해결사로 알고 있습니다.”그런데 고양이가 여섯 명인데요?” “그래, 작은 고양이는 내 침실 침대 옆에 있어.” 그는 노트북을 작은 고양이라고 불렀다. 아마 잠자리에서도 노트북으로, 전자책으로, 메일을 보내고 메모도 하는 것 같았다.’고양이’가 7마리나 필요한 이유를 묻자 그는 대답 대신 컴퓨터 전원을 차례로 켰다. 자,이컴퓨터에서는인터넷을열어놓고TED동영상을듣고중요한내용은마인드젯(mindjet)앱으로정리합니다. 다른 컴퓨터에는 에버노트(evernote) DB를 검색하면서 중요 자료를 긁어 마인드젯 메모노트에 붙여줘” 이 교수는 수잔 블랙모어 교수의 최신 미메틱스 인터넷 강연이 클라우드 컴퓨팅으로 정리돼 한 편의 논문이 돼가는 과정을 직접 보여줬다. 그의 컴퓨터에는 마인드젯 외에도 ‘더 브레인’, 국내 앱으로 ‘씽크와이즈’도 있었다. 고양이가 쥐를 잡듯이, 그리고 그 손톱으로 화면 자료를 긁어 빠르게 DB를 구축해가는 모습을 옆에서 보니 컴퓨터를 고양이라고 불렀다는 것이 실감났다.이렇게 자료로 모은 파일은 아래 한글로 변환하여 드롭박스에 보내 저장한다. 그러면 7대, 아니 수십대의 다른 컴퓨터에서 직접 호출해 원고를 쓸 수 있다. 해외여행을 하는 경우도 서재에서 컴퓨터를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새끼 고양이들은 무릎에도 올라 있다. 책상 맞은편 안락의자 옆에는 아이패드, 갤럭시노트, 킨들과 같은 모바일 기기가 나란히 꽂혀 있었다.그가 즐겨 찾는 사이트는 와이어 인터넷판(www.wired.com). 일주일에 적어도 1번은 꼭 들어 본다”라고 말했다.”논문과 책이 되기 전에 지식인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취재한 기사이다. 이미 나온 책을 보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디어를 공유하면서 함께 생각하고 가는 시대야.”디지로그나 생명 자본주의의 같은 말들은 인터넷을 검색해도 안 나오고 그것이 바로 이런 글로벌 지식의 싱크로나이즈에서 나왔을까?그는 이렇게 말했다.”자본주의의 배와 함께 침몰할 수는 없다. 그래서 저는 지금 떼를 만들고 있는 중이야. 이처럼 지식의 최전선이 형성된 정작 지식인들이 뒤편에만 앉아 있으면 될까요?”문정 형모(정·효은모)기자 [email protected]사진, 정·허 송 객원 기자/중앙 선데이 2014.09.13 03:27 <연합초대석>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베이징올림픽은 동북아 패러다임을 바꾼 세계적 이벤트> “중국의 반한감정, 경쟁의식과 민족주의에서 출발해 “중일에 맞서기 위해서는 물량보다 보편성, 고유특성을 가져야 한다” “문화경쟁력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서울=연합뉴스) 홍성완 편집위원=”냉정하게 분석해야 한다. 우리에게 잘못이 뭐가 있었고 중국의 잘못이 뭐가 있었는가. 예를 들면 역풍이라는 게 있죠. 공을 그냥 들고는 안 날아갑니다. 세게 때리면 세게 반작용으로 올라옵니다. 그러면 중국인 혐한증이 있기 전에 뭔가 한국이 세게 때린 적이 있잖아요. 그게 한류였죠.”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올림픽 기간 중국인들이 드러낸 반한 감정의 배경에 대해 역사 문화적 논리로 설명하면서 한류 문화도 하나의 빌미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중일 3국이 민족주의 경쟁을 하면 깨지는 것은 한국이라며 3국이 ‘가위바위보’ 원리에 따라 서로의 특성을 존중하면서 경쟁과 협력을 동시에 해나가는 커피티션(copetition) 관계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베이징 올림픽이 갖는 의미와 상징, 한. 중국 관계에 미치는 영향 등을 이어령 전 장관에게서 들었다. 88서울올림픽 개회식 당시 쇠고리 소년의 아이디어로 세계를 놀라게 한 이 전 장관은 최근 첫 시집을 내는 등 70대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베이징올림픽을 지켜본 감회가 깊었던 것 같은데요.▲ 이번 베이징 올림픽은 중국인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동북아 패러다임을 바꾸는 큰 세계적인 행사였습니다. 동북아에서 가장 먼저 올림픽을 한 곳이 도쿄였고, 거의 20년 후에 서울에서, 또 20년 후에 베이징에서 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도 이렇게 시나리오를 쓸 수는 없잖아요. 남미라든지 이른바 남반구에서는 올림픽을 할 수 있는 나라가 없습니다. 호주 정도가 있을 뿐이에요. 19세기만 해도 동쪽은 동, 서쪽이라고 했지만 아시아에서 세 나라가 올림픽을 치른 지금은 동서양의 문명 문화적 균형이 거의 평준화되고 거의 같은 눈높이로 업그레이드되었습니다.유럽 기준으로 보면 일본은 해양, 한국은 반도, 중국은 대륙입니다. 해양세력이 반도에서 대륙으로, 즉 씨파워에서 랜드파워로, 랜드파워에서 씨파워로 오는 문명선을 너무나 극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도쿄, 서울, 베이징을 합쳐서 ‘베세토’라고 하는데, 이 베세토라는 맥락에서 읽지 않으면 베이징 올림픽이 갖는 의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중국이 다시 아시아의 맹주로 돌아왔습니다. 중국이 제일 처음에는 이념대국이었고 이어서 군사대국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개방하지 않았다면 올림픽이 되었을까요?개방에 좀 더 채찍을 가해서 지금은 이념, 군사, 경제, 그다음에 문화의 힘, 이것을 중국이 가지려고 하는 거죠. 우리에게는 매우 충격적이고,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중국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볼 수 없는 자유분방함입니다. 새 둥지로 불린 주경기장 하나만 봐도 사회주의 건축물은 아니라는 것이군요. 서울 올림픽 때와 비교해 보면 어떻습니까.▲ (쇠고리 소년 얘기를 하면서) 역대 개폐회식에는 아이가 나온 적이 없었어요. 튼튼한 남자 중심으로 되어 있었는데 처음으로 아이를 앞세워 생명이라는 것, 정적 속에서 아이가 흰 옷을 입고 쇠고리를 굴리며 지나가는 빈 공간, 아이를 보여준 것이 아니라 그 햇살이 가득한 주경기장 자체와 배경, 즉 그림을 그리는 백지를 그림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돈이나 재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정적과 공백을 이용한 동양의 정신, 그 자체를 보여준 것입니다. 이런것들이문화이고예술이지불꽃을몇발 쐈는지불꽃으로무엇을그렸는지이런것들은기술이죠. 베이징 올림픽의 경우 립싱크한 것은 괜찮지만 올림픽 행사를 전 세계에 보여주기 위한 영화 촬영 세트장으로 만든 것은 비난받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막강한 일본과 이번에 본 것처럼 화려하고 웅장한 중국 사이에서도 우리가 살아남을 힘이 있다고 느낍니다. 20년 전, 우리는 대낮에 개회식을 가졌습니다. 거짓말을 할 수 없고 가짜도 만들 수 없어요. 햇빛 아래 어디에 숨기고 매달아요? 그런 대낮에 영상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들의 숨결과 꿈틀거리는 역동성을 보여준 것입니다. 물량주의 경쟁에서는 저희가 어렵습니다. 장예모 감독의 영화적인 화려한 스펙터클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쇠고리처럼 뒤통수를 때리는 아이디어나 창의력을 가지면 중국의 13억을 한 사람이 이길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우리가 일본, 중국과 경쟁할 때는 도쿄나 베이징 올림픽이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을 서울 올림픽이 보여준 것이 무엇이었는지 이를 평가하고 검증하고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넘버원이 아니라 온리원(only one), 한국이 해야 남들이 할 수 있는 것, 이 온리원이 있을 때 우리는 작든 크든 존재 이유가 있고 세상에 살아남아 당당히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베이징 올림픽을 보면서 무조건 우리는 안 된다는 패배주의에 빠져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우리가 잘난 체하는 우월의식을 가져서도 안 됩니다.주경기장을 외국인에게 발주했다고 해서 중국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그것은 큰 실수입니다. 그런 건축가를 사용할 수 있는 중국, 독특한 설계를 받아준 중국이 놀라운 일이라는 거죠. 중국의 주경기장이 우리를 압도했듯이 서울올림픽 주제가 ‘한인한'(hand in hand)은 중국을 압도해버렸습니다. 외국인에게 작곡을 발주했는데 가사 중에 ‘벽을 넘어’ ‘아리랑’ ‘서울’이라는 3절을 넣어 한국화시킨 것을 전 세계에 800만 장이나 팔았습니다. 그 아이디어가 중요한 거죠. 정확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욕하는 것, 욕하고 칭찬하는 것, 또 우리를 비교해서 다른 사람의 좋은 점, 나쁜 점을 객관적으로 봐야 합니다. 민족우월의식을 가지고 덮어씌워서도 안 되고, 중국을 덮고 숭배하거나 비하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이 베이징 올림픽을 보는 관전평입니다. –중국인이 한국팀이 아닌 일본팀을 응원한 것을 어떻게 봐야 합니까.▲ 혐한증이 있기 전에 뭔가 한국이 중국에 대해서 세게 때린 적이 있죠. 그게 한류였네요. 한편으로는 대장금을 통해 한국 것을 즐기면서도 한편으로는 한류 열풍에 대한 역효과도 커지는 것입니다. 한류 열풍을 가장 싫어하는 것이 중국 배우들입니다. 한류 배우들이 중국에 오면 사람들이 열렬한 반응을 보이니까 기분이 너무 안 좋아지더라고요. 중국 배우 몇 명이 반발하기 시작하면서 한국을 비방한 것 중 하나가 대장금에 나오는 침전입니다. 한의는 중국이 원조인데 자기들 것이라며 판다는 식으로 말했고, 즐겨 보던 사람들도 쾌활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5월 5일 단오절처럼 기수가 합쳐지는 달은 중양절이라고 해서 시경에도 나오는 중국의 아주 오래된 전통입니다. 근데 유네스코에

~~~~~~~~~~~~~~~~~~~~~~~~~~~~~~~~~~~~~~~~~~~~~~~~~~~~~~~~~~~~~~~~~~~~~~~~~~~~~~~~~~~~~~~~~~~~~~~~~~~~~~~~~~~~~~~~~~~~~~~~~~~~~~~~~~~~~~~~~~~~~~~~~~~~~~~~~~~~~~~~~~~~~~~~~~~~~~~~~~~~~~~~~~~~~~~~~~~~~~~~~~~~~~~~~~~~~~~~~~~~~~~~~~~~~~~~~~~~~~~~~~~~~~~~~~~~~~~~~~~~~~~~~~~~~~~~~~~~~~~~~~~~~~~~~~~~~~~~

~~~~~~~~~~~~~~~~~~~~~~~~~~~~~~~~~~~~~~~~~~~~~~~~~~~~~~~~~~~~~~~~~~~~~~~~~~~~~~~~~~~~~~~~~~~~~~~~~~~~~~~~~~~~~~~~~~~~~~~~~~~~~~~~~~~~~~~~~~~~~~~~~~~~~~~~~~~~~~~~~~~~~~~~~~~~~~~~~~~~~~~~~~~~~~~~~~~~~~~~~~~~~~~~~~~~~~~~~~~~~~~~~~~~~~~~~~~~~~~~~~~~~~~~~~~~~~~~~~~~~~~~~~~~~~~~~~~~~~~~~~~~~~~~~~~~~~~~

문화부 초대 장관을 지낸 이화여대 이오룡 명예석좌교수가 26일 암 투병 끝에 별세했다. ⓒ연합뉴스

문화부 초대 장관을 지낸 이화여대 이오룡 명예석좌교수가 26일 암 투병 끝에 별세했다. ⓒ연합뉴스

“죽음이라는 것은 지나치다고 생각하지?아니. 내가 즐거운 글을 쓰고 있는데 즐거운 아이들과 놀때 갑자기 부르는 소리를 들어. “이제 놀지 말고 돌아와서, 밥 먹어라!”이쪽에 어머니의 세계로 건너오라는 명령이야”지난해 10월에 출판된 『 리어령의 마지막 수업 』(김·지수 지음 열린 엔화)의 일부분이다. 저자와의 대담에서 이·오료은 선생님은 “어머니는 밥이건 주머니인 생명”이라며”죽음이 하나의 생명이다. 어머니의 곁, 원래의 모태에의 귀환했다”이라고 말했다.26일 숨진 고 나·오료은 선생님의 마지막 이유는 죽음이었다. 그는 말년에 삶과 죽음에 대한 지적이고 따뜻한 깨달음을 몇개 남겼다.그에게 죽음은 구체적이고 인근에 있었다. 고향의 보리밭에서 혼자 굴렁쇠를 굴리던 6세 때 그 죽음을 알게 눈물을 흘렸다. 무엇보다 2012년 장녀 이·미나 목사를 보내야 했다. “3개월 시한부”암 선고를 받은 치료 없이 인생의 마지막을 누리고 떠난 딸이었다. 이·오료은 선생님은 2016년”딸에게 보내는 굿 나잇 키스”를 내면서 먼저 보낸 딸을 그리워해. 항상 글을 쓰고 책을 읽고 바쁜 아버지의 후회, 딸을 다시 만나서 끌어안는 환상이 들어 있었다.여기서도 이어령 선생은 죽음에 대해서 이유를 말했다. “추상 명사가 아니라, 물건 이름처럼 손으로 쥘 수 있어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던지면 깨질 수 있는 유리 그릇 같은 매우 구상적인 명사에서 죽음은 그렇게 내 앞에 온 것이다.”그는 이 책에서 새로운 출산 자녀의 울음 소리에서 딸의 생일을 기억하고 운다는 슬픔이 잉태된 희열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보였다. 2019년 개정판 서문에서 고인은 “죽음이 허무요의 끝이 없다는 사실을 넌 보았다. 선혈이 흘렀다 상처가 치유되어 그 딱지가 떨어졌던 아픈 고기에서 새 살이 나다”라고 썼다.2019년에는 중앙 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암 선고를 전하면서 죽음과 인생을 연결했다. “과일 중에 씨앗이 있듯이 생명 속에는 죽음도 있다. 보다. 손바닥과 손등, 두 사람을 어떻게 떼어놓을 것인가. 뒤집으면 손바닥으로 뒤집으면 손등이다. 죽음이 없다면 어떻게 생명이 있을까.”물론 그에게 죽음은 본능적으로 무서웠다. 『 이 영혼의 마지막 수업 』에서 그는 죽음을 “쇠창살 호랑이”에 비유한 엘리자베스·크이브라ー·로스 말을 인용했다. 죽음학자의 손실이 “남의 죽음이 동물원 철창 속의 호랑이라면 나의 죽음은 쇠창살을 나와서 덤벼들호랑이”이라는 말이다. 이·오료은 선생님은 “전두엽과 생각하는 죽음과 척추 신경에서 감각하는 죽음은 이렇게 거리가 멀다”라고 말했다.생전에 나온 마지막 책도 죽음을 다루고 있다. 지난 달 출간된 『 메멘토·모리 』이다. 삼성의 고 나·병철 회장이 죽음과 대면하고 던진 24개의 질문에 이·오료은 선생님의 대답이다. 그는 여기에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의 유행에 의한 죽음을 다루는 죽음의 범위를 개인에게서 대중에 확장했다.그는 이 책에서 유행 시대의 죽음에 대해서 이런 이유를 전했다. “우리 안에 있던 죽음, 지금까지 알던 그 사자가 아니다. 무섭지만 그래도 안심하고 본 그 놈이 골목 입구에서 출근 길 만원 버스 속에서 시장에 가는 길에서 우연히 만난 것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죽”라는 철학자나 성직자의 가르침보다 강렬하게 이 죽음이라는 무서운 사자를 그 괴물을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이 인류에게 보이고 버린 것입니다”.”임모털(immortal, 죽지 않는 존재는 신 뿐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다. 신 이외의 존재는 모두 죽는다. 그것이 원죄야. 이것이 모틀(mortal,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야. 목숨이라는 것은 모두 죽는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를 통해서 메멘토·모리를 다시 깨닫게 된 것입니다”오래 전에 시작된 암으로 육체는 무너졌지만, 고인에게는 그것조차 하나의 탐구 대상이었다. 매주 1,2회 고인을 만나고 온 윤·이재환 한중일 비교 문화 연구소의 전 사무국장은 ” 다른 세상 3일 전에 만났을 때조차 죽음을 관찰했다”이라고 말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인생처럼 개념, 이 세계의 개념으로 깨닫게 된 “이라고 말했다. 불쾌하고 아프고 입이 마르다 죽음의 증상을 적극적으로 관찰했다. 정신은 오히려 더 맑고, 뚜렷했다. 평생을 호기심에서 사신답게 죽음까지 들여다보다”. 윤·이재환 전 사무국장은 마지막 만남에서 고인이 ” 자면서 죽고 싶다”고 하신 말씀을 기억했다. 병원 대신 집에서 서재와 연결된 집필실에 병원 침대를 들여놓은 뒤 거기에서 속세를 떠나고 싶어 했다. “누구는 저렇게도 죽을 수도 있구나라는 모습을 보이고 싶다”라는 말도 남겼다. 이·오료은 선생님은 정말 26일 오후 1시쯤 자던 중 숨졌다.김·호정 기자/중앙 일보 2022.02.26 16:04″나는 실패한 인생을 살았다”…고 나·오료은 선생님이 그런 하나

=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 /뉴스1

문화부 초대 장관을 지낸 이화 여대 명예 석좌 교수의 이어령(이·오료은, 89)이 26일 사망했다. 고인은 생애”우리 시대 최고의 지성”이라는 평가를 받아 왔다. 그러나 그는 생전에 스스로”실패한 인생”을 보냈다고 평가했다. 왜 그럴까?김·지수 조선 비즈 기자가 물어 이 교수가 대답한 인터뷰집”이·오료은의 마지막 수업”에서 이 교수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존경은 받았지만 사랑은 받지 못 했다. 그래서 외로웠다. 다른 삶을 사는 것은 섭섭하다”고 회고했다.”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에도 “남이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사실상 겸손이 없는 실패한 인생을 샀어. 그것을 느낀다”이라고 말했다. 계속”세속적인 문필가로서 교수로서, 장관으로서 활동했으므로 성공했다고 할까. 그러나 나는 실패한 인생을 보냈다. 겸손은 아니다. 나는 실패했다. 그것을 항상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고 덧붙였다.그는 “저에게는 친구가 없다. 그래서 내 인생은 실패했다. 혼자 나의 그림자만 보고 달려온 인생이다. 동행 없이 숨을 헐떡이며 여기까지 달려왔다. 가끔은 동행자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면 라이벌이었던 “이라고 설명했다.

/뉴스1

1933년 충청 남도 아산시(충청 남도·아산시)에서 태어난 고인은 생전, 문학 평론가, 소설가, 수필가, 언론인, 교수 등으로 활약하며 한국 대표적인 석학으로 불렸다.이 교수는 1956년”문학 예술”에 “현대시의 환경과 한계”,”비 교육 법 논고”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그 해 문단 원로의 권위 의식을 질타했다”우상의 파괴”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큰 반향을 불렀다.1966년 이화 여자 대학 강단에 선 뒤 평생을 교수로 지내고 경향 신문 등 주요 언론의 논설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노태우(노·테우)정부 당시 신설된 문화부 초대 장관을 역임하고 한국 예술 종합 학교와 국립 국어 연구원(현 국립 국어원)을 설립했다.이 교수는 문화 예술상(1979), 체육 훈장 맹호장(1989), 일본 문화 디자인 대상(1992)대한민국 녹조 훈장(1992)대한민국 예술원상(2003)3·1문화상 예술 상(2007)자랑스러운 이화인 상(2011), 소브 충의 지사 선 문화상 특별상(2011)등을 수상했다.그는 2017년에 암을 선고 받은 2번 큰 수술을 받았지만 이후 치료를 중단한다”죽음이 눈앞에 닥치더라도 글을 쓴다”과 마지막의 집필에 몰두했다.유족으로는 부인 강·인숙 에이닌 문학관 관장, 장남의 이·승리의 한국 예술 종합 학교 교수, 차남인 이·암의 천안 대학교 애니메이션 학과 교수가 있다. 빈소는 서울 대학 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될 예정이다.정·현주 기자/머니 투데이 2022.2.26 14:56이·오료은 초대 문화부 장관 사망. 향년 89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낸 이화 여대 이·오료은 명예 석좌 교수가 26일 사망했다. 향년 89.1933년 충청 남도 아산시(충청 남도·아산시)에서 태어난 고인은 문학 평론가, 언론인, 교수 등으로 활동하면서 문학 평론과 기호학 연구서, 소설은 물론 다양한 문화론 글과 수필을 발표했다. 초기 에세이 『 땅 속에 저 바람 속에 』(1963)은 한국 문화와 심성의 원형을 독자적으로 탐구한 책으로 수백만 부가 팔린 베스트 셀러가 됐다. 1982년에 일본과 한국에서 함께 나왔던<축소 지향의 일본인들 역시 일본 사회와 문화의 핵심을 “축소 지향”라는 날카로운 표현으로 삼아 양국에서 베스트 셀러가 되는 일본 문화론의 중요한 텍스트로 떠올랐다.고인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의 개폐 회식 총괄 기획을 담당하고 굴렁쇠 소년 퍼포먼스 같은 참신한 행사를 선 보여 체육 훈장 맹호장을 수상했다. 또 노태우(노·테우 정부 때인 1990년에 신설된 문화부 초대 장관을 지냈고, 2년 가까이 봉직하고 현재 문화 체육 관광부의 기초를 닦았다. 한국 예술 종합 학교와 국립 국어원의 창설도 초대 문화부 장관 이어령의 치적으로 평가된다. 지난해 10월 노태우(노·테우 전 대통령이 사망했을 때 그는 “영전에 바치는 질경이 꽃 하나의 의미”라는 조시를 쓰고”독재와 독선, 역사의 이륜차가 지나간 자국 아래 겨우 핀 굳은 질경이 꽃의 모습”이라며 노 전 대통령을 기렸다.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한 1956년<한국 일보>신춘 문예에 “우상의 파괴”는 패기 넘치는 제목의 평론으로 등단한 고인은 문학 평론가로 활동하는 한편<서울 신문><한국 일보><중앙 일보>논설 위원들과<경향 신문>파리 특파원을 역임하는 등 언론계에도 오래 했다. 1972년 월간 문예지 『 문학 사상 』를 창간하고 1985년까지 주간을 맡아 1977년 이상 문학 상을 제정하고 한국을 대표하는 문학 상으로 했다.문학 평론가 이·오료은의 초기 이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1968년 2~3월<조선 일보>지면에서 전개된 시인 김·수연과의 “순수-참여 논란”이다. 김·수연은 앞서고<사상계>1월호에 기고한 “지식인의 사회 참여”라는 글에서 이·오료은을 실명으로 비판한 바 있다. 이·오료은는 신문 기고문에서 한국 문화를 “새우가 지배하는 문화”로 규정하고 문화인이 유아적 공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김·수연은 이·오료은이 현실의 구체적 억압을 “새우” 같은 추상적이고 가상적인 금제에 바꿨다며 정치 권력의 탄압을 직시할 것을 촉구했다. 이에 대해서 이·오료은이<조선 일보>2월 20일에 “누가 조종을 울리는가?”라는 글에서 “오도된 참여론”을 비판하고 이에 대한 김·수연은 신문 2월 27일자에 “실험적 문학과 정치적 자유”란 글에서 대항한다. “모든 전위 문학은 불온하다”라는 유명한 명제가 제출된 것이 이 글이었다. 이에 다시 이·오료은이 같은 신문 3월 10일에 “문학은 권력이나 정치 이념의 시녀가 아니라”라는 문장으로 맞서는 등 논란이 뜨거워진행됐다. 이·오료은은 김·수연 시인 40주기를 기념하고 2018년에 나온 헌정 산문집<시는 나의 닻이다>에 글을 올린다” 많은 손상하는 왜곡된 오해를 살 선생님과의 논쟁을 정리하기 위해서도 본격적인 김·수연론을 완성하기로 약속”이라며”서로에 누운 자리는 달라도 우리는 같은 꿈을 보았을 것이다”란 말로 글을 마쳤다.고인은 장관 퇴임 후 대한민국 예술원 문학 분과 회원, 대통령 자문 새 천년 준비 위원회 위원장, 이 육사 기념관 건립 추진 위원장 등으로 활동하는 한편, 연구서 『 공간의 기호학 』과 『배구의 시학 』, 시집 『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 신앙 고백서 『 지성에서 영성에 』 등을 출판했다. 무신론자였던 그가 신앙에 귀의하게 된 것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 앤젤레스 지역의 검사를 맡아 2012년 위암 투병 끝에 사망한 큰딸 이·미나 목사의 일이 계기가 됐다는.2017년에 암이 발견되어 2번 큰 수술을 받은 고인은 항암 치료를 거부하고 마지막 저작 시리즈”한국인 이야기”집필과 “메멘토·모리” 같은 대담 집에 몰두했다. 그는 지난해 10월 한국 문학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금관 문화 훈장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강·인숙 에이닌 문학관장과 장남의 이·승리의 한국 예술 종합 학교 교수, 차남인 이·암의 백석 대학교 교수가 있다.최·제본 선임 기자 [email protected]/한겨레 2022-02-26 14:50끝까지 오른 통찰력. 이어령(이·오료은)초대 문화부 장관 사망

이 시대의 지성을 대표하는 석학 이·오료은 초대 문화부 장관이 26일 암 투병 끝에 숨졌다. 향년 88세. 지난해 12월 22일 본보와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시간이 없고 절박하다. 어쩌면 내일 해가 뜨는지도 모른다”고 밝혔다. 고인은 암 투병 사실이 알려진 뒤에도 항암 치료를 거부하는 “죽음이 눈앞에 닥치더라도 글을 쓴다”와 집필을 계속했다.● 88올림픽의 식전 행사를 기획한 르네상스인

1934년 충청 남도 아산(충청 남도·아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1956년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했다. 1955년 서울대 문리과에 발표했다”이상론”에서 신흥 문학 평론가로서의 가능성을 제시한 그는 1956년 한국 일보에 게재한 “우상의 파괴”비평문에서 문단에 파문을 일으켰다. 1960년에는 26살이고 서울 신문 논설 위원으로 발탁된 이후 한국 일보, 경향 신문, 중앙 일보 조선 일보를 거쳤다.고인은 1967년 33세에 이화 여대 국문과 교수로 임용되어 30년 이상 강단에 섰다. 1973년에는 잡지”문학 사상”으로 출판사”문학 사상사”를 설립하고 1977년에는 국내 최고 권위의 문학 상 중 하나로 꼽히는 “이상 문학 상”을 제정했다. 고인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의 개폐 막식 식전 행사 기획자로도 활약했다. “화합과 전진”이란 주제 의식과 역동성을 다 표현한 명문으로 평가된다”벽을 넘어”구호와 개막식에 등장한 굴렁쇠 소년 기획은 모두 고인의 아이디어였다.1990년 노태우(노·테우)정부에서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낸 고인은 당시 한국 예술 종합 학교와 국립 국어 연구원(현 국립 국어원)을 설립하고 조선 총독부 청사를 철거하는 경복궁 복원 계획을 수립했다. 미술 대중화에 기여한 국립 현대 미술관” 움직이는 미술관”행사를 기획했다. 또 문화 예술상(1979), 체육 훈장 맹호장(1989), 일본 문화 디자인 대상(1992)대한민국 녹조 훈장(1992)대한민국 예술원상(2003)3·1문화상 예술 상(2007)자랑스러운 이화인 상(2011), 소브 충의 지사 선 문화상 특별상(2011)등을 수상했다.● 끝까지 오른 통찰력

이 전 장관은 동아 일보와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코로나 사태 등에 대한 통찰력 있는 전망을 내놨다. 그는 “독재자를 피해서 달아날 수 있지만, 지금은 대피하면 백신도 때리지 못하는 “이라며”각국의 지도자들이 백신을 배급하고 생명을 구하는 신과 같은 존재로 군림할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계속”포스트 코로나를 이끄는 것은 주류 아닌 보리밭처럼 밟고 올라온 마이너리티에 될 것”이라며”사람들의 편견을 바로잡는 역할을 지식인이 해야 한다. 그러나 최근 지식인들은 정치 경제에 종속되어 있다. 정치 밖에서 정치를 객관화할 지식인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코로나 사태로 생명 가치에 대한 중요성이 커질 것이라는 전망도 내놓았다. 그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COVID-19)이전의 나라를 판단한 기준인 GDP(국내 총생산)수치가 환자 수, 사망자 수에 바뀌었다. 물질 가치가 『 생명 가치 』에 바뀐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고인이 말년에 가장 큰 애착을 보인 것은 “생명 자본주의 운동”이었다. 그가 2014년 초에 출판했다”생명이 자본이다”는 “생명 사랑”과 “장소 사랑”,”창조 사랑”이라는 3개의 사랑을 키워드로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산업·금융 자본주의 모델의 대안을 탐색하는 책이다. 유럽과 미국 발 금융 위기를 지켜보면서 생명 자본주의에 대한 생각을 가다듬고 왔다는 그는 “생산이 아니라 살아 있는 번식을 모델로 한 경제, 생명과 사랑이 녹아 있는 경제, 돈이 자본이 되는 시대에서는 없는 생명이 자본이 되는 시대가 오고 있다”이라고 예상했다.유족으로는 부인 강·인숙 에이닌 문학관 관장, 장남의 이·승리의 한국 예술 종합 학교 영화과 교수, 차남인 이·암의 백석 대학교 애니메이션 학과 교수가 있다. 고인의 큰딸 이·미나 목사는 2012년 위암 투병 끝에 숨졌다. 빈소는 서울 대학 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장례는 5일 가족장으로 치러진다.이호 재(이·허제)기자 [email protected]/동아 일보 2022-02-26 14:06한국 최고 지성을 떠나고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 사망, 향년 88세2020년 2월 이오룡 선생님의 모습.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산다는 건 무엇인가. 내 말을 하나 넣고 나가는 것은 아닐까.”2년 전 이·오료은 선생이 남긴 말이다. 평생을 바치며 세상에 이야기를 보탠 한국 지성의 기둥인 그가 26일 사망했다. 향년 88세. 만년의 그는 죽음에 대한 성찰을 공유하고 우리의 삶을 돌아보도록 했다. “그리스어에서 온 단어 『 자궁(womb·음악)』과 『 무덤(tomb·툼)』은 놀랄 만큼 비슷하다. 인간은 태어날 죽는다. 기저귀이 까칠까칠한 수의를 닮은 것 아닌가. 죽음은 인간을 망치는 것이 아니라 풍요롭게”복막에서 비롯된 암이 벌어졌지만 수술을 적절한 시점에서 중단하고 집에서 보냈다. 병원에서 태어났고 거기서 죽대신 죽음을 평화롭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어젊었을 때는 비평적 작문을 앞세운 “문화 투사”에 가까웠다. 1956년 평론”우상의 파괴”로 문단을 흔들고 나타났다. 김·동거나 팬·승원, 서울·전주 등 기존 문단의 안이함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이었다. 이어 59년 문학의 사회 참여를 비판한 평문”작가의 현실 참여”는 한국 문단을 다시 일깨웠다. 그는 문학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창조력이 우선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기성 문인들을 주저 없이 비판했다. 문학 연구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시인 이상(이· 산)의 작품에 몰두하고 신비화한 삶에서 작품을 독립시키는 문학적 해석을 내렸다.지난달 자택에서 이오룡 선생님 [사진 한국예술종합학교]고인의 일은 문명 비판, 문학 창작뿐 아니라 문화 기획, 교육까지 확장됐다. 무엇보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막식을 총 지휘했고 다양한 장면을 역사에 새겼다. 8세의 굴렁쇠 소년이 넓은 잔디밭을 가로지르는 장면은 이 선생님의 어릴 적에 뿌리내렸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6살 때, 굴렁쇠를 굴리며 보리밭 길을 가는 화려한 햇살 속에서 눈물이 맺혔다”이라고 말했다.또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올림픽 주제가”손에 손을 잡고”에는 모두가 손을 뻗친 채 모두 강강술래를 추는 한국식 화합이 녹아 있었다. 본래 영어로 적힌 가사가 있지만 고인이 아이디어를 내고”벽을 넘는다”이라는 의미를 강조한 번역 가사로 불렀다. 올림픽 이후 이 선생은 1990년부터 1년 초대 문화부 장관 재임했다.대학이나 언론에서도 고인의 역할은 컸다. 이화 여대 국문과 교수로 30여년 재직하며 01년에 석좌 교수로 은퇴했다. 72년에는 월간 『 문학 사상 』의 창간 멤버로 주간을 맡았다. 활동 영역은 국내에 한정되지 않았다. 80년대에는 도쿄 대학 객원 연구원 일본 국제 일본 문화 연구소 객원 교수로 재임했다. 중앙 일보 조선 일보 한국 일보, 경향 신문 논설 위원으로 활약했지만 처음 서울 신문 논설 위원으로 임명됐을 때는 불과 26세였다. 01~15년에는 중앙 일보 상임 고문을 역임했다.故 이어령 선생님의 대표 저작 [중앙포토]60여년 동안 고인이 남긴 저작은 130여종에 이른다. 문학 비평에서 시작, 소설, 시, 대담, 에세이 등을 발표했다. 고인의 시각은 날카로운 앞을 향하고 있었다. 한국이 배고픔에 빠졌던 68년에는 산업화를 예상하고 『 땅 속에 저 바람 속에 』을 냈다. 산업화가 한창일 때는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으로 나아가”이란 슬로건으로 새로운 주제를 제시했다. 시대가 바뀐 사회 전체에 디지털 열풍이 불 때는 아날로그와 융합을 말해”디지로그”을 선언했다. 모두가 무언가에 빠질 때 고인은 그 다음을 보고 있었다.이렇게 그의 눈은 다시 인류의 인간적 미래를 향했다. 이처럼 현재와 미래를 먼저 읽으면서 쓴 저작 속에서 『 축소 지향의 일본인 』은 일본 사회를 놀라게 했고 『 지성에서 영성에 』 『 가위 바위 보 문명론 』 『 인문학 』 『 지식의 최전선 』 등은 지성의 웅장한 여정을 증명했다.고인이 발견된 또 하나의 키워드는 “창조”이었다. 그는 한국의 위상에 대해서”남의 뒤통수에 따라가고 선두에 서게 된 입장이다. 갑자기 들판이 눈앞에 360번에 퍼졌다”에 비유했다. 이때 중요한 것이 무언가를 모방하지 말고 새로운 창조”창조”이었다. 09년에는 각계 각층의 인사를 멘토로 창조 학교를 만들고 군사력, 경제력에 앞서창조력을 강조했다.한국의 지성을 대표하는 원로 지식인은 끝까지 사유와 저술을 멈추지 않았다. 2020년 2월”한국인 시리즈”의 첫번째 책”너는 어디서 왔어”를 냈다. 개인적 기억, 생물학, 역사, 과학 지식을 동원하며 한국 문화 유산을 설명하는 얘기였다. 전 12권에 예정했던 한국의 문화 유전자에 대한 글은 마지막까지 멈추지 않았다. 자택의 서재를 병상에 바꿔도 집필과 퇴고을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2번째 책”젓가락질 유전자”를 퇴고 중이었다. 출판사 바람 북의 전·혜정 대표는 “출판을 4월 정도로 했으며, 나머지 책도 모두 80%이상 원고가 완성되어 있다”고 전했다. 『 알파 바둑과 함께 춤을 』 『 회색의 교실 』 등으로 이어지는 시리즈이다. 마지막 대작에 그는 “나는 대학 교수도 장관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다. 이야기꾼이다. 어린 아이가 할아버지가 되어 어린 시절 할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를 아이들에 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고인은 2017년 암 선고를 받았으나, 방사선 치료와 항암 치료 없이 병원에서 건강 체크만을 하며 지냈다. 젊은 시절, 지성에서 한국인의 정신을 이끌었다 하면 만년에는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깨달음에서 우리를 숙고했다.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뀐 때도 다시 꽃을 볼 수 있겠느냐고 생각할 때 처음으로 꽃이 보인다. 암 선고를 받고 내일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역설적으로 가장 농밀하게 살”. 유족으로는 부인 강·인숙(건국대 명예 교수), 아들의 이·승무(한국 예술 종합 학교 영상원 영화과 교수)이·강무(천안 대학교 애니메이션과 교수)가 있다. 장녀의 이·미나 목사는 2012년 위암으로 사망했다.김·호정 기자/중앙 일보 2022.02.26 13:51″우리 시대의 지성”이·오료은 전 문화부 장관 사망60여 년 동안 고인이 남긴 저작은 130여 종에 달한다. 문학 비평으로 시작해 소설, 시, 대담, 에세이 등을 발표했다. 고인의 시각은 날카롭게 앞을 향하고 있었다. 한국이 배고픔에 빠졌던 1968년에는 산업화를 전망하고 땅속으로 저 바람속으로를 냈다. 산업화가 한창일 때는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는 슬로건으로 새로운 주제를 제시했다. 시대가 바뀌고 사회 전체에 디지털 열풍이 불 때는 아날로그와의 융합을 이야기하는 ‘디지로그’를 선언했다. 모두가 무언가에 빠져 있을 때 고인은 그 다음을 보고 있었다.이처럼 그의 눈은 다시 인류의 인간적 미래로 향했다. 이처럼 현재와 미래를 먼저 읽으면서 쓴 저작 중 축 새끼 손가락향의 일본인은 일본 사회를 놀라게 했고 지성에서 영성으로 가위바위보 문명론 보자기 인문학 지식의 최전선 등은 지성의 장대한 여정을 증명했다.고인이 발견한 또 다른 키워드는 창조였다. 그는 한국의 위상에 대해 남의 뒤통수를 따라가다 보니 앞장서게 된 입장이다. 갑자기 들판이 눈앞에 360도로 펼쳐졌다고 비유했다. 이때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모방하지 않고 새롭게 만들어내는 창조였다. 2009년에는 각계각층 인사를 멘토로 하는 창조학교를 만들어 군사력, 경제력에 앞선 창의력을 강조했다.한국 지성을 대표하는 원로 지식인들은 끝내 사유와 저술을 멈추지 않았다. 2020년 2월 ‘한국인 시리즈’의 첫 번째 책 ‘너는 어디서 왔니’를 냈다. 개인적 기억, 생물학, 역사, 과학 지식을 동원해 한국인의 문화유산을 설명하는 이야기였다. 총 12권으로 예정해 둔 한국의 문화유전자에 대한 집필은 끝까지 멈추지 않았다. 자택 서재를 병상으로 바꾸고도 집필과 퇴고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두 번째 책 젓가락 유전자를 퇴고 중이었다. 출판사 바람북 정혜정 대표는 출간을 4월 정도로 했고 나머지 책들도 모두 80% 이상 원고가 완성됐다고 전했다. 알파고와 함께 춤을 회색 교실 등으로 이어지는 시리즈다. 마지막 대작에 대해 그는 “나는 대학교수도 장관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다. 화자다. 어린 아이가 할아버지가 돼 어렸을 때 할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해주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고인은 2017년 암 선고를 받았지만 방사선 치료와 항암 치료를 하지 않고 병원에서 건강 체크만 하며 지냈다. 젊은 시절 지성으로 한국인의 정신을 이끌었다면 만년에는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깨달음으로 우리를 숙고하게 했다.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었을 때 다시 꽃을 볼 수 있을까 싶을 때 비로소 꽃이 보인다. 암 선고를 받고 내일이 없다는 얘기를 들은 뒤 역설적으로 가장 농밀한 삶을 살겠다.” 유족으로는 부인 강인숙(건국대 명예교수), 아들 이승무(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 교수), 이강무(천안대 애니메이션과 교수)가 있다. 큰딸 이미나 목사는 2012년 위암으로 사망했다.김호정 기자 / 중앙일보 2022.02.26 13:51 ‘우리 시대의 지성’ 이오룡 전 문화부 장관 별세화가 구 모토오가 1935년에 그린 『 친구의 초상 』. “히로토 상”이라고도 불리고 온 이 작품은 작가의 친구였던 문인상(이· 선 김·혜경)의 기인 같은 뼈를 그린 것으로 알려졌다. 1972년 『 문학 사상 』 창간호의 표지에 실린 이후 대중에 이상을 대표적 이미지로 유명했다.끌어올린 눈빛으로 우로 부치는 파이프 담배를 물고” 하고 밤”정면을 바라보는 이 남자. 그는 누구?국립 현대 미술관 덕수궁관 제1전시실에 걸린 화가 구 모토오(아·본 은, 1906~1953)의 1935년작 『 친구의 초상 』은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로 불리는 문인 이상(이· 선, 1910~1937)의 무효화를 그렸다. 이·선이 일본 도쿄에서 요절한 2년 전, 연상의 친구 구·본 은의 캔버스 앞에서 보인 모습이다. 검붉은 색으로 뒤덮인 데스크 톱에서 이·은은 초라한 파란 색 모자·작업복 차림으로 그림자의 얼굴에 냉소와 경멸, 울분의 정서를 내뿜는다. 야수파, 표현주의풍의 날카로운 채색과 거친 필치로 옮긴 형상 구성이 특출하다. 식민지 예술가, 지식인이 억압된 내면 의식이 한꺼번에 느껴지는 초상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은 이 그림을 통해서<오감 그림><날개>로 기억되는 이상의 기인 같은 풍모를 떠올리곤 한다.구·본 많이 이·선은 인왕산 기슭에서 자랐다. 신명 초등 학교에 함께 다닌 것을 인연으로 평생 친구로 지냈다. 총독부의 건축 기사를 그만두고 재수가 된 이상을 구·본 웅이는 친형처럼 보살폈다. 아버지가 만든 출판사에 이·선을 취업시키고 황해도 배천 온천에 휴양 여행을 가거나 문예지<청색지>에 이· 선 사후 유고 작품을 싣기도 했다. <친구의 초상>은 이런 끈끈한 인연을 짊어지고 그려졌다. 일설에는 소공동에 구·본 웅이가 만든 골동품 가게에서 창작하며 이·선이 운영한 종로 제비 다방에 걸렸다고도 한다.1972년 10월에 출판된 『 문학 사상 』 창간호의 표지. 청색 배경에 구·본 은의 “친구의 초상”도판을 올렸다. 이상을 그린 초상화로는 당시 처음 공개된 작품이다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친구의 초상>은 두 사람이 사망한 뒤 한참 지난 1972년 국립 현대 미술관”한국 근대 미술 60년”전이 끝난 뒤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구·본 은의 작품이 한국 전쟁 당시 폭격으로 대부분 사라지고 남은 작품도 집 안에 내력을 모른 채 흩어졌기 때문이다. 전시 소식을 들은 유족들이 뒤늦게 작품을 미술관 측에 가져오고 매입을 타진했으나 구·본 웅이가 누군지도 모른 공무원들은 구입 예산이 없다고 무시했다. 탄 유족들은 전시 기획 위원이었던 평론가 이·교은송과 당시<서울 신문>의 이·그욜 기자에게 작품 중에 이상의 초상이 있다며 사정을 알렸다.때마침, 문학 평론가 이어령(이·오료은)은 초대 주간을 맡아 발간 예정이었던 『 문학 사상 』 창간호의 표지에 한국 문학사의 숨은 대가들의 초상을 올리기로 하고 그림을 찾고 있었다. 이·그욜는 친했던 『 문학 사상 』 편집장에 이상 초상이 있다고 귀띔했다. 듣고 기뻐했다 이·오료은은 즉시 그림을 사려고 하고 50만원의 수표를 건넸지만 이·그욜는 고심 끝에 사양하고, 미술관을 다시 설득했다. 이 씨는 당시를 이렇게 떠올렸다. “미술관에서는 안 사는데. <문학 사상>에서 알린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보면 구·본 은 대표작은 너무 적어 미술사적으로도 중요하므로 꼭 미술관에 있어야 한다는 확신을 가졌어요. 그래서 수표를 물렸습니다”화가 이·승만이 그린 이·선과 구·본 은. 척추 장애로 몸이 작은 구·본 많이 키가 훨씬 크고 마른 이…산이 함께 경성 시가지를 걷는 모습은 그 자체로 화제가 되었다고 전해진다.이·교은송 이·그욜의 설득 끝에 당시 장·상규 미술관장은 특별 예산을 편성하고<친구의 초상><나부>을 포함한 구·본 은 유작 8점을 72년 말에 사들였다. 이어령은 수중에 들어갈 뻔했다 이상의 초상화를 결국 놓쳤다. 이지만, 초상 도판이 실린 “문학 사상”창간호는 당시로서는 전례 없는 3판까지 찍어 1만 2000부 이상 팔리는 기록을 세웠다. 오늘 이상 문학의 재조명을 알리는 기폭제가 된 셈이다. 이·오료은 평론가는<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원본을 갖지 말고 유감이지만,<문학 사상>에 이상 초상이 오른 것은 대단한 사건이었다. 이·선은 물론 구·본 은까지 한국 문학사의 주역으로 부상시킨 단서가 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명작으로 남게 됐다”라고 생각했다. 노·형석 기자 [email protected], 도판 국립 현대 미술관 제공/한겨레 2018-06-1905:01이·오료은가 원하던 “이상의 얼굴”:음악·공연·전시:문화:뉴스:한겨레(hani.co.kr)그의 책상 위에는 촉각을 곤두세운 7명의 “고양이”가 있다.이경선, 이구열의 설득 끝에 당시 장상규 미술관장은 특별 예산을 편성해 <친구 초상> <나부>를 포함한 구본웅 유작 8점을 72년 말 매입했다. 이어녕은 손아귀에 잡힐 뻔했던 이상의 초상화를 결국 놓쳤다. 하지만 초상도판이 실린 ‘문학사상’ 창간호는 당시로서는 전례가 없는 3판까지 찍으며 1만2000부 이상 팔리는 기록을 세웠다. 오늘날 이상문학의 재조명을 알리는 기폭제가 된 셈이다. 이오룡 평론가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원본을 갖지 못해 아쉽지만 <문학사상>에 이상 초상이 실린 것은 대단한 사건이었다. 이상은 물론 구본웅까지 한국 문예사의 주역으로 떠오르게 한 단초가 됐고 내 인생에서도 가장 잊을 수 없는 명작으로 남게 됐다고 느꼈다. 노현석 기자 [email protected], 도판 국립현대미술관 제공/한겨레 2018-06-1905:01 이오룡이 탐낸 ‘이상형 얼굴’: 음악 공연 전시: 문화: 뉴스: 한겨레(hani.co.kr) 그의 책상 위에는 촉각을 곤두세운 7명의 ‘고양이’가 있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