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우주를 만들어 간다./p.156
17세 가을부터 문과와 이과의 선택을 놓고 큰 고민에 빠진 적이 있다. 수학과 과학보다는 국어와 영어 성적이 나름대로 높은 편이어서 눈에 보이는 내용만 놓고 보면 문과를 선택하는 게 정답이었겠지만 같은 성적 대비 이과가 대학에 가기 쉽다는 말과 생물과 지구과학에 흥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은 이과로 갖고 있었다. 주변에서는 수학도 못하는 아이가 어떻게 이과에 갈 생각이냐고 만류했다.
결국 생물과 지구과학을 믿고 이과를 선택했다. 그리고 나는 전교에서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었다. 모의고사 화학과목 전교 꼴찌 9등급 수학 2과목 0점 학생. 쉬는 시간에 문과 친구의 세계지리시험지를 빌려서 푸는 신기한 아이. 사실 생물과 지구과학이 그렇게 자랑할 만한 성적이 아니었다. 어차피 문과를 선택해도 서울권 대학들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성적이어서 지역권 내에서 원하는 전공을 쉽게 넣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내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이 책은 천문학자 심채경 작가의 에세이이다. 가능한 한 다양한 종류의 서적을 읽으려 하지만 늘 역사와 과학 분야는 소홀해진다. 리뷰 기록을 남긴 뒤 지금까지 철학 사회 분야 책은 그래도 읽은 반면 과학과 역사 분야 도서는 각각 2권씩 읽었다. 제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라 조금 거리를 뒀지만 과거 지구과학에 흥미를 조금 가졌던 사람으로서 그래도 쉽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 읽게 됐다.
크게 대학의 비정규직 행성 과학자, 이과형 인간입니다, 아주 짧은 천문학 수업, 우리는 모두 태양계 사람들로 네 가지 범주를 포함하고 있다. 행성 과학자이자 교수로서의 삶, 별을 보는 사람의 삶, 천문학을 다루는 학자로서의 삶, 지구 구성원으로서의 삶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느껴졌다. 1부 대학 비정규직 행성 과학자와 3부의 매우 짧은 천문학 수업 부분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대학 비정규직 행성 과학자는 타이탄 위성을 연구하는 행성 과학자와 대학교수로서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개인적으로는 학생들에게 첫 시간에 나눠준 질문과 학생들에게 보낸 메일 내용이 가장 인상 깊었다. 천문학에 대한 정답부터 학생들의 생각까지 묻는 6가지 질문. 그중에서도 유니버스와 코스모스, 공간의 차이를 묻는 질문은 나의 생각을 잠시 멈추고 호주에서 북두칠성을 볼 수 없다는 새로운 지식을 습득했다. 또 취업신고를 하겠다는 학생과 성적 이의제기를 하는 학생에게 진심이 담긴 저자의 답장은 훈훈했다.
아주 짧은 천문학 수업은 우리가 어렴풋이 알았거나 전혀 몰랐던 천문학에 대한 지식이 담겨 있다. 1부에서는 마음을 가득 채운 파트였다면 3부는 머리가 꽉 차는 파트이기 때문에 새로운 정보가 매우 흥미롭게 느껴졌다. 내게 샴푸 이름으로 더 익숙한 랑데부가 두 우주 비행체가 서로 같은 방향과 속도로 궤도를 돈다는 의미로 쓰인다는 사실도, 134340이라는 명왕성의 또 다른 이름도 이 책에서 만난 새로운 지식이었다. 대충 내용만 알고 있던 천동설과 지동설의 대립, 나에게는 조금 낯설었던 동방칠수의 내용도 신기했다.
읽으면서 천문학자 특유의 개그 코드가 내 취향과 너무 잘 맞아 그 또한 보는 재미가 있었다. 특히 경기도 화성으로 이사한 친구의 집을 우주선을 타고 멀리 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은 딸의 질문에 너무 멀어서 못 간다고 답한 저자의 모습이 상상돼 저도 모르게 웃었다. 올해 초 본 우주 SF소설 개그코드가 생각났는데, 이 정도면 과학자들이 낡았다는 내 편견이 미안할 정도였다.
다른 의미로 천문학이 로맨틱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내용 중간 등장하는 표현에 저도 모르게 마음이 녹아들기도 했다. 시나 소설보다는 다소 논리적이면서도 직관적일 수 있지만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어린왕자가 의자에서 태양을 보는 내용에 대해 천문학적인 논리로 맞지 않음을 설명하면서도 아무것도 묻지 않고 장미를 들어주는 어른이 되겠다는 다짐과 우주의 먼지로 헤매던 우리가 지구를 만난 것이 우주적으로 멋진 랑데부였다는 표현이 그랬다. 이 또한 사실과 논리에 맞게 딱딱할 것이라는 나의 편견에 두 번 미안하게 됐다.
천문학 지식보다는 천문학자이자 행성 과학자로 살아있는 저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일상과 재미있는 행성 이야기가 부담스럽지 않게 펼쳐져 있어 천문학에 대해 잘 몰라도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측면에서 좋았다. 고등학교 지구과학Ⅰ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내가 읽기에도 별 무리가 없었다. 얄팍한 지식을 갖고 있거나 천문학에 대한 지식을 넓히고 싶었다면 실망했을지 모르지만. 하지만 종이 한 장보다 얇은 지식으로도 행성 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 점이 나에게는 정말 만족스러웠다.